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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 의부전록 의술명류열전11 514권 명나라5

고금도서집성의부전록 (古今圖書集成醫部全錄)은 중국 청나라 장정석(蔣廷錫) 등의 편찬으로 1723년에 간행된 의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일부분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부터 청나라 초기의 문헌까지 의학문헌 100여 종을 분류하여 편찬한 것으로, 고전 의서에 대한 주석, 각과 질병의 변증논치(辨證論治) 및 의학과 관련 있는 예문(藝文), 기사(記事)와 의학자의 전기(傳記) 등을 포괄한다. 전 520권이며, 기초이론, 분과 치료, 논술과 처방 등 내용이 풍부하며, 서술이 체계적이고 전면적이다. 영인본이 나와 있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欽定古今圖書集成]으로 황제가 친히 명령하여 고금의 모든 도서를 모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략 康熙 연간에 陳夢雷(1651~1723) 등이 편찬하기 ..
고금도서집성의부전록 (古今圖書集成醫部全錄)은 중국 청나라 장정석(蔣廷錫) 등의 편찬으로 1723년에 간행된 의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일부분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부터 청나라 초기의 문헌까지 의학문헌 100여 종을 분류하여 편찬한 것으로, 고전 의서에 대한 주석, 각과 질병의 변증논치(辨證論治) 및 의학과 관련 있는 예문(藝文), 기사(記事)와 의학자의 전기(傳記) 등을 포괄한다. 전 520권이며, 기초이론, 분과 치료, 논술과 처방 등 내용이 풍부하며, 서술이 체계적이고 전면적이다. 영인본이 나와 있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欽定古今圖書集成]으로 황제가 친히 명령하여 고금의 모든 도서를 모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략 康熙 연간에 陳夢雷(1651~1723) 등이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가 蔣廷錫(1669~1732) 등이 이어받아 근 50년 만인 雍正4년 1726년에야 완성하였다.전서의 총 권수 1만 권, 1억6천만여자로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백과전서이다. 목록만 해도 40권에다가 經史子集의 문헌 3523종이 포괄되어 있다. 역사정치, 문화예술, 과학기술, 제자백가 등 상고시대로부터 淸初까지 동양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였는데, 天文을 기록한 曆象彙篇, 지리·풍속의 方輿彙篇, 제왕·백관의 明倫彙篇, 의학·종교 등의 博物彙篇, 문학 등의 理學彙篇, 과거·음악·군사 등이 들어있는 경제휘편의 6휘편으로 크게 나뉘어 진다.



이를 다시 32典 6,109部로 세분하였고 각 부는 彙考·총론·도표·列傳·藝文·選句·紀事·雜錄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의부전록’은 바로 이『고금도서집성』중의 일부로 정확히는 博物彙篇 藝術典(2917~2928冊)에 들어있다. 초간본은 武英殿聚珍版 구리활자판인데 매우 희귀하며, 이 책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 과정도 상당히 극적이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학술자료를 모으게 하고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능력 있는 북학파 학자들을 檢書에 등용하는 학예진흥책을 벌였다. 당시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던 徐浩修(1736~1799)는『古今圖書集成』전질을 구해오라는 특명을 받고 떠났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대단한 귀중본으로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서 마침내 중개인을 앞세워 翰林院에 뇌물을 주고서야 기어코 銅活字初印本 1질을 구할 수 있었다. 정조는 너무 기뻐서 책의 장정을 새로 잘 고쳐서 창덕궁 규장각의 皆有窩에 소장케 하였다. ‘개유와’란 ‘모든 것이 다 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그 기상을 찬탄할 만하다.



또 규장각은 애초에 訥齋 梁誠之(1414~1482)가 세조 재위초기에 설립을 奏請한 바 있으나 실행되지 못했던 것인데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이룩되었다. 『의방유취』의 교정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보건의료제도의 설비, 軍陣醫 확대를 주창하여 의서 출판과 의료정책 측면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던 양성지의 국가도서관리제도 계획안이 실현되어 마침내 『도서집성』의 수장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기막힌 인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이용되는 流布本은 1884년 上海圖書集成局에서 간행된 것으로 오류가 많고 1890년 上海同文書局이 영인한 것에는 고증이 첨부되어 있어 비교적 정확하다고 한다. 색인으로는 일본 문부성에서 펴낸 [고금도서집성분류목록]이 있고 L. 자일스가 [An Alphabetical Index]를 대영박물관에서 간행한 바 있다. 또『古今圖書集成續錄初稿』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국내에도 이들 다양한 판본과 참고서가 수장되어 있어 참조할 수 있다.실용적인 목적이 뛰어나서였는지 전서와는 별도로 의학부분은 훨씬 더 많이 인쇄되었는데, 초인본을 축쇄영인한 것이 있고 표점과 교정을 가한 연활자본 등 몇 종의 편집본이 나온 바 있으나 교감이 정확치 않고 임의로 산삭한 부분이 있어 고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계의 衆評이다. 또 이들 후대의 편집본을 펴내면서 ‘의부전록’ 혹은 ‘의부전서’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다소 적절치 않은 이름으로 원서명을 고려한다면 ‘고금도서집성醫部’가 정확한 표현이다.

예시문
 王錫
왕석

按《衡州府志》:王錫,號露山, 桂陽人。
형주부지를 살펴보면 왕석은 호가 노산이며 계양 사람이다.
遇異人得醫術,郡中大疫,以藥施之全活者衆。
기이한 사람을 만나서 의술을 얻어서 군에 큰 역질이 있어서 약으로 베풀어주어 전부 살린 사람이 많았다.
後仙去。
뒤에 신선으로 떠나갔다.

   鎖萬言
쇄만언

按《浙江通志》:鎖萬言,字盛松,始祖飛扈蹕 蹕(길 치울, 임금의 거동 필; ⾜-총18획; bì)
南渡,遂居武林,代有隱德。
절강통지를 살펴보면 쇄만언은 자가 성송으로 시조가 호종하여 임금의 거동을 따라 남쪽으로 옮겨와서 무림에 살아서 대대로 은덕이 있었다.
萬言生而嗜學,不得志,於有司去而業醫,嘗遊天目山中,遇異人,盡得其術。
쇄만언은 탄생하여 학문을 즐겼으나 뜻을 얻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학을 하여 일찍이 천목산에 유람하여 기이한 사람을 만나서 의술을 다 얻었다.
歸而濟世,活人甚多。
돌아와 세상을 구제하니 사람을 살림이 매우 많았다.
子文良,孫乾世守其業,不墜厥緒。
아들은 쇄문량과 손자인 건세는 의업을 지켜서 그 실마리에 떨어지지 않았다.
今稱良醫者,人必推鎖氏云。
지금 양의라고 칭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쇄씨를 추존하여 말한다.

   朱績
주적

按《嘉興府志》:朱績,字君用,精於醫,決生死百不失一.
가흥부지를 살펴보면 주적은 자가 군용으로 의학에 정밀하여 생사를 판결함에 백에 하나도 실수가 없었다.
遇證有疑難,雖名醫林立,必待績,一言而決.
증상을 만나서 의심과 어려움이 있으면 비록 명의가 숲처럼 서 있어도 반드시 주적을 기다리니 한 마디로 판결하였다.
前後郡縣屢旌其門。
앞뒤의 군현에서 자주 정문을 세웠다.

   葛天爵
갈천작

按《湖廣通志》:葛天爵,監利人,少治醫術,見同列無愈己者,遂遍訪湖山,與一道士遇於江上,與之語輒解,登舟語數月,遂精脈理,用藥每奇中。
호광통지를 살펴보면 갈천작은 감리 사람으로 젊어서 의술을 하여 동렬을 보면 낫게 하지 않음이 없고 호산에 두루 방문하여 한 도사와 함께 강 위에서 만나서 그와 더불어 말하면 곧 해소하니 배를 타고 수개월을 말하니 맥리에 정통하여 약을 사용함에 기이한 적중이 있었다.

   萬拱
만공

按《湖廣通志》:萬拱,監利人,能詩,神明於醫術。
호광통지를 살펴보면 만공은 감리 사람으로 시를 잘하고 의술에 신명이 있었다.
著《醫學大成》、《傷寒指南》若干卷,惜多散亡。
의학대성, 상한지남 약간권을 지었으나 애석하게 산실되어 없어짐이 많았다.
《病源》一書,尤前此所未有。
병원 한 책은 더욱 이 앞에 있지 않았다.
然性頗矜直懶晉接 진접: 귀인을 나아가 뵘. 또는 귀인을 영접함
,有召者,輒以病辭,而饋以方焉。
성품이 뻐기고 곧 귀인을 맞이함에 게을러 부르면 병으로 사양하니 처방을 보냈다.

   楊載
양재

按《無爲州志》:楊載,字博菴,醫精傷寒有奇效,活人甚衆。
무위주지를 살펴보면 양재는 자가 박암으로 의학에는 상한에 정통하여 기이한 효과가 있고, 사람을 살림이 매우 많았다.
時稱爲楊家傷寒。
이 때 양가상한이라고 칭했다.

   喻化鵬
유화붕

按《寶慶府志》:喻化鵬,字圖,南豐城人。
보경부지를 살펴보면 유황붕은 자가 도로 남풍성 사람이다.
以精醫遊邵陽,其於切脈望色聽聲察形之妙, 終夜研究,若經生家治病,如臨大敵,稍不中肯,憂形於色,靜夕深思,辰起即赴病家。
의학에 정통하여 소양에 놀아서 진맥하고 안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형체를 관찰함의 오묘함을 늦은밤까지 연구하여 만약 집에 병을 치료함에 큰 도적이 임한듯하며 조금 맞지 않음을 색보다 형체를 근심하여 고요한 저녁에 심사숙고하여 새벽에 일어나 환자집에 다다랐다.
調劑不論貧富,不惜重值之料,人予之金,即以市奇方祕論。
약을 조제함에 빈부를 막론하고 거듭 값나가는 재료를 아끼지 않고 사람이 금을 주면 시장에 기이한 처방과 비밀논의로써 하였다.
雅尚氣節,能文詞,嘗構一樓藏古書史,好與諸名士遊。
우아하고 기의 절도를 숭상하고 문사를 잘하여 일찍이 한 누각의 장고서사를 만들어 여러 명사와 더불어 교류함을 즐겼다.
所著《醫經》翼耑 耑(시초, 실마리 단; ⽽-총9획; duān,zhuān)
愚禪師序之,《醫餘詩草》車子仁方伯序之。
저서는 의경이 있어서 익단우 선사가 서문을 짓고 의여시초는 차자인 방백이 서문을 지었다.
其卒也,友人劉默菴經理,葬於東郭五里碑之右,厚恤其子以歸。
죽음에 벗인 유묵암이 이치를 기록하고, 동곽 5리에 매장하여 비석을 우측에 세워 자식을 긍휼을 두터이 하고 돌아갔다.

   夏閣
하각

按《無爲州志》:夏閣,施藥濟人,拾金還主,兩舉鄉飲。
무위주지를 살펴보면 하각은 약을 베풀어 사람을 구제하니 금을 주어 주인을 돌려주니 두 번 향음례를 거행하였다.

   宋子京
송자경

按《湖廣通志》:宋子京,黃岡人。
호광통지를 살펴보면 송자경은 황강사람이다.
學舉子業不售,去而習醫,久之悟《素問》、《靈樞》、《六腑內外》、《穴穴相應》,又心智洞朗,一望而知人病之所以。
과거업을 배웠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버리고 의학을 익혀서 오래 소문, 영추, 육부내외, 혈혈상응을 깨닫고 또한 마음과 지혜로 통찰하여 한번 보면 사람 병이 생긴 이유를 알았다.
有巡道無他病,但不能食,郡守以子京進,子京曰:
순도가 다른 병이 없이 다만 먹지만 못하여 군수가 송자경을 들어오게 하니 송자경이 말했다.
且無往,當先觀之。
이는 가지 않고 먼저 그를 보겠습니다.
巡道出,子京從,輿上一觀,乃敝衣冠垢汙而進,巡道不悅,出而語人曰:病瘳矣。
순도가 나가서 송자경이 따라서 수레위에서 한번 보니 헤진 옷과 의관과 더럽고 때묻어서 나아가니 순도가 기뻐하지 않고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니 병이 나았다고 했다.
次日,呼子京入,則美其衣冠。
다음날에 송자경을 불러 들어가게 하니 좋은 의관을 입었다.
巡道曰:昨日不如此,大致余怒。
순도가 말하길 어제는 이와 같지 않아서 내가 크게 분노하게 되었다.
子京曰:昨日垢敝,乃醫公者也。
송자경이 말하길 어제 때뭍고 해진 옷은 공을 치료한 것입니다.
公生平常得喜病,一怒而喜消病愈,便能食矣。
공은 평생 항상 병을 좋아하니 한번 분노하면 기쁨이 없어져 병이 나으니 곧 먹을 수 있습니다.
遊會城中,見舁棺者漏血一滴,子京曰:此可生也。
성중에 유람하다가 관을 메고 가는 사람이 한 방울의 피를 떨어뜨리니 송자경이 말하길 이 사람은 살 수 있다.
問之,則婦以難娩死,呼夫至,開棺一針其穴,娩一男,母子俱全。
묻자 부인이 난산으로 죽으니 남편을 불러 이르게 하여 관을 열어 경혈을 한번 자침하니 한 남아를 분만하니 산모와 아이가 모두 살았다.
前郡守在黃,子京視脈曰:
전 군수가 황에 있을때 송자경이 진맥하였다.
十年後當領西城節鉞,然當墜下頦。
10년뒤에 서성절월을 다스릴 것이니 턱이 떨어질 것입니다.
至十年後,撫蜀果病,且兩月,急走人邀子京治.
10년 뒤에 이르러 촉에 위무하여 과연 병들어 또한 2달에 급하게 사람들 달려 송자경을 불러 치료케 하였다.
子京至,入署交拜,以手掖撫軍起,而下頦已上矣。
송자경이 이르러 관청에 들어가 절하니 손으로 군사를 도와 위무하다가 턱이 빠져 이미 들렸다.

   駱驤 驤(머리 들, 뛰어오르다 양; ⾺-총27획; xiāng)

낙양

按《嘉興府志》:駱驤,字子龍,長子鄉人。
가흥부지를 살펴보면 낙양은 자가 자룡으로 장자향 사람이다.
事後母孝,雅愛吟詠,時與縉紳金豐村燦范菁山言項少嶽元淇遊,尤究心岐黃之術,察脈檢方,侔於神巧,兼擅水墨,白描黃痴倪迂間。
양어머니를 효도로 섬기니 우아하게 시 읊음을 즐겨서 때로 벼슬아치 금풍촌 찬범청산언항소옥원기에서 노니 더욱 기백과 황제의 의술을 연구하여 맥을 관찰하여 처방을 점검하여 신교함을 기다리니 수묵을 잘 그려서 백색으로 황색 어리석은 아이가 멀게 있음을 그렸다.
有《言志集》行世。
언지집이 있어 세상에 유행하였다.

   劉從周
유종주

按《醫學入門》:劉從周,醫有自得之見,著書十篇論痢疾以手足和煖爲熱,厥冷爲寒,如盛夏發熱有進退者爲冒暑,熱不止者爲傷寒,至當之言也。
의학입문을 살펴보면 유종주는 의사가 스스로 얻은 견해가 있어서 저서는 10편에서 이질이 손발이 따뜻한가 열한가를 논의하니 궐랭은 한증이고 만약 더운 여름에 발열하고 진퇴함이 있으면 더위에 감촉함이니 열이 그치지 않으면 상한이 되니 지당한 말이다.

   王中立
왕중립

按《烏程縣志》:王中立,世居小湖織里,精嬰兒方脈,求治如市。
오정현지를 살펴보면 왕중립은 세상에 소호직리에 살아서 영아의 방맥에 정통하니 시장처럼 치료를 구하였다.
孫以勤爲安吉訓術,曾孫元吉爲德清訓術,應召入覲 覲(뵐, 겨우 근; ⾒-총18획; jìn)
,留太醫院。
자손인 왕근이 안길훈술이 되어서 증손자인 왕원길은 덕청훈술이 되니 불리어 알현하여 태의원에 머물렀다.
有《幼科類萃》行世,後裔時鍾世其業。
유과유췌가 있어서 세상에 유행하니 후혜인 왕시종이 의업을 이었다.

   常效先
상효선

按《嘉興府志》:常效先,號瀛泉。
가흥부지를 살펴보면 상효선은 호가 영천이다.
少補博士,後棄去,攻岐黃家言,尤精痘疹,其門如市。
젊어서 박사에 보하여 뒤에 버리고 떠나서 기백과 황제의 의가의 말을 전공하여 더욱 두진에 정통하여 시장처럼 문에 사람이 많았다.
性簡僻,賦詩娛老,自號無繫居士。
성품은 간단하고 치우쳐 늙은이를 시부를 하여 스스로 무계거사라고 호칭하였다.
臨終賦詩辭世,所著有《心鏡篇》、《衍慶錄》藏於家。
임종의 시부로 세상에 말하니 심경편, 연경록의 저술이 있어서 집안에 감추어졌다.

   呂愷陽
여개양

按《仁和縣志》:呂愷陽,立志濟人。
인화현지를 살펴보면 여개양은 뜻을 세워 사람을 구제하였다.
偶得異人授,專治折傷,每於武闈騎射有墮馬箭傷,即傅以藥,立甦,併不問其姓名,歷十餘年。
우연히 기인의 전수를 얻어서 오로지 절상을 치료하니 매번 무위기사에서 말에 떨어지고 화살에 손상됨이 있어서 약을 붙이면 곧 깨어나니 함께 성명을 묻지 않고 10여년이 지났다.
亦近世之韓伯休也。
또한 근세의 한백휴이다.

   徐仲宇
서중우

按《湖廣通志》:徐仲宇,不知何許人,善岐黃術,慣用針.
호광통지를 살펴보면 서중우는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나 기백과 황제의 의술을 잘하며 침을 잘 사용했다.
凡奇疾濱死者,一針即活,人號太素先生。
기이한 질병으로 빈사상태에 있을때 한 침으로 살리니 사람들이 태소선생이라고 칭했다.

   伍鳳
오봉

按《湖廣通志》:伍鳳,知醫。
호광통지를 살펴보면 오봉은 의학을 알았다.
人有疾,請之詣宅,病去七分,人稱盧醫。
사람이 질병이 있으면 청하여 집에 이르니 병이 7푼은 제거되니 사람이 노나라 의사인 편작이라고 칭하였다.
강희제 ( 康熙帝 ) 때의 진몽뢰 ( 陳夢雷 ) 가 시작한 것을 옹정제 ( 雍正帝 ) 때의 장정석 ( 蔣廷錫 ) 이 이어받아 1725 년에 완성
진몽뢰 (陳夢雷)는 중국 청나라 때 사람. 자(字)는 칙하(則霞), 또는 성재(省齋)이며 복건성(福建省) 민후(閩侯) 태생. 강희(康熙) 연간에 진사가 되어 편수(編修)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나중에 무고를 당해 하옥(下獄)되고 유배되었다. 10여 년 후에 풀려났는데, 옹정(雍正) 초년(初年)에 다시 귀양을 갔으며, 귀양지에서 죽었다. 『도서집성·의부전록(圖書集成·醫部全錄)』 등의 편수를 주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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