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도서집성의부전록 (古今圖書集成醫部全錄)은 중국 청나라 장정석(蔣廷錫) 등의 편찬으로 1723년에 간행된 의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일부분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부터 청나라 초기의 문헌까지 의학문헌 100여 종을 분류하여 편찬한 것으로, 고전 의서에 대한 주석, 각과 질병의 변증논치(辨證論治) 및 의학과 관련 있는 예문(藝文), 기사(記事)와 의학자의 전기(傳記) 등을 포괄한다. 전 520권이며, 기초이론, 분과 치료, 논술과 처방 등 내용이 풍부하며, 서술이 체계적이고 전면적이다. 영인본이 나와 있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欽定古今圖書集成]으로 황제가 친히 명령하여 고금의 모든 도서를 모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략 康熙 연간에 陳夢雷(1651~1723) 등이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가 蔣廷錫(1669~1732) 등이 이어받아 근 50년 만인 雍正4년 1726년에야 완성하였다.전서의 총 권수 1만 권, 1억6천만여자로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백과전서이다. 목록만 해도 40권에다가 經史子集의 문헌 3523종이 포괄되어 있다. 역사정치, 문화예술, 과학기술, 제자백가 등 상고시대로부터 淸初까지 동양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였는데, 天文을 기록한 曆象彙篇, 지리·풍속의 方輿彙篇, 제왕·백관의 明倫彙篇, 의학·종교 등의 博物彙篇, 문학 등의 理學彙篇, 과거·음악·군사 등이 들어있는 경제휘편의 6휘편으로 크게 나뉘어 진다.
이를 다시 32典 6,109部로 세분하였고 각 부는 彙考·총론·도표·列傳·藝文·選句·紀事·雜錄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의부전록’은 바로 이『고금도서집성』중의 일부로 정확히는 博物彙篇 藝術典(2917~2928冊)에 들어있다. 초간본은 武英殿聚珍版 구리활자판인데 매우 희귀하며, 이 책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 과정도 상당히 극적이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학술자료를 모으게 하고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능력 있는 북학파 학자들을 檢書에 등용하는 학예진흥책을 벌였다. 당시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던 徐浩修(1736~1799)는『古今圖書集成』전질을 구해오라는 특명을 받고 떠났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대단한 귀중본으로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서 마침내 중개인을 앞세워 翰林院에 뇌물을 주고서야 기어코 銅活字初印本 1질을 구할 수 있었다. 정조는 너무 기뻐서 책의 장정을 새로 잘 고쳐서 창덕궁 규장각의 皆有窩에 소장케 하였다. ‘개유와’란 ‘모든 것이 다 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그 기상을 찬탄할 만하다.
또 규장각은 애초에 訥齋 梁誠之(1414~1482)가 세조 재위초기에 설립을 奏請한 바 있으나 실행되지 못했던 것인데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이룩되었다. 『의방유취』의 교정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보건의료제도의 설비, 軍陣醫 확대를 주창하여 의서 출판과 의료정책 측면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던 양성지의 국가도서관리제도 계획안이 실현되어 마침내 『도서집성』의 수장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기막힌 인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이용되는 流布本은 1884년 上海圖書集成局에서 간행된 것으로 오류가 많고 1890년 上海同文書局이 영인한 것에는 고증이 첨부되어 있어 비교적 정확하다고 한다. 색인으로는 일본 문부성에서 펴낸 [고금도서집성분류목록]이 있고 L. 자일스가 [An Alphabetical Index]를 대영박물관에서 간행한 바 있다. 또『古今圖書集成續錄初稿』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국내에도 이들 다양한 판본과 참고서가 수장되어 있어 참조할 수 있다.실용적인 목적이 뛰어나서였는지 전서와는 별도로 의학부분은 훨씬 더 많이 인쇄되었는데, 초인본을 축쇄영인한 것이 있고 표점과 교정을 가한 연활자본 등 몇 종의 편집본이 나온 바 있으나 교감이 정확치 않고 임의로 산삭한 부분이 있어 고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계의 衆評이다. 또 이들 후대의 편집본을 펴내면서 ‘의부전록’ 혹은 ‘의부전서’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다소 적절치 않은 이름으로 원서명을 고려한다면 ‘고금도서집성醫部’가 정확한 표현이다.
예시문
唐繼山
당계산
按《會稽縣志》:唐繼山,以字行,萬曆年間,人住安寧坊。
회계현지를 살펴보면 당계산은 자행이며 만력년에 사람으로, 안녕방에 머물렀다.
少喜讀書,長而習醫,以溫補爲事,多奇效,尤能以脈理決生死於數年前。
젊어서 독서를 좋아하고 장성하여서는 의학을 익혀서 온보를 일삼아서 많이 기이한 효과가 있어서 더욱 맥의 이치로 수년전의 생사를 결정하였다.
人至今稱之,有《脈訣》行世。
사람이 지금 칭함에 맥결이 있어서 세상에 유행한다고 했다.
李尚元
이상원
按《江寧府志》:李尚元,字仰春,以治傷寒名家。
강녕부지를 살펴보면 이상원은 자가 앙춘이며 상한병을 치료하는 이름난 의가이다.
焦太史嘗贈以文略云:
초태사가 일찍이 문략이란 말을 주면서 말했다.
自古論病,惟傷寒最爲難療,表裏虛實,稍不審,輒不可救。
고대로부터 병을 논의함이 오직 상한이 가장 치료하기 어려우니 표리와 허실이 조금도 살피지 않으면 곧 구제하지 못한다.
尚元有三勝焉,每用藥言,某時當得睡;某時當得下;時刻皆應,一也。
이상원은 3가지 뛰어남이 있으니 매번 약을 사용하여 말하니 어떤 때는 잠을 자게 하며, 어떤때는 사하케 하며, 시각이 모두 반응함이 한결같았다.
有一兒病,誤服補劑,幾殆。
한 아이병에 잘못 보제를 복용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
尚元所用獨異,群咻 咻(떠들, 시끄럽다, 앓다 휴; ⼝-총9획; xiū)
之,不爲動,卒以奏功。
이상원이 홀로 기이하게 사용하여 여러 의사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마침내 공로가 주효하였다.
嘗曰:倉公言吾以脈法治而愈,二也。
일찍이 말하길 태창공이 내가 맥법으로써 치료하게 나음이 두가지라고 말했다.
龐安常治傷寒有名,傳稱其樂義耐事如慈母而有恆。尚元爲人似之,三也。
방안상은 상한병을 치료함에 유명하니 전해지길 악의내사를 자모와 같이 하니 항상됨이 있었다.
其爲名公推服,如此子言,曾孫鍾懋時遇,皆世其業有聲。
유명한 공이 추천하여 복용케 하길 이처럼 그대의 말과 같으니 증손자 이종무가 때로 만나니 모두 의업을 대대로 함에 유명했다.
王有禮
왕유례
按《嘉興府志》:王有禮,休寧人,嘉興邑庠生,本姓沈,字三五,居鴛鴦湖上。
가흥부지를 살펴보면 왕유례는 휴녕사람이니 가흥읍상 생이니 본래 성은 심씨로 자는 삼오로 원앙호 위에서 살았다.
精軒岐術善治傷寒。
왕유례는 황제, 기백의 의술에 정통하여 상한병을 잘 치료하였다.
有《尊生內編》十卷葉向高序,《尊生外編》八卷岳元聲序,皆行世。
존생내편 10권을 섭향고가 서문을 지으니 존생외편 8권은 악원성이 서문을 지으니 모두 세상에 유행하였다.
瞿介福
구개복
按《靖江縣志》:瞿介福,其初常熟人,後徙靖以醫名。
정강현지를 살펴보면 구개복은 초상숙 사람으로 뒤에 정으로 이사가서 의사로 유명하였다.
萬曆時,邑中瘟疫大作,介福施濟,所活甚衆。
만력시대에 읍에 온역이 크게 발생하여 구개복이 시행하여 구제하니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鄒志夔
추지기
按《靖江縣志》:鄒志夔,字鳴韶,其先丹陽人。
정강현지를 살펴보면 추지기는 자가 명소로 선조가 단양 사람이다.
少業儒,一再試不售,輒棄去,怡情墳典 분전: 삼분 오전(三墳五典)의 준말. 삼황(三皇)·오제(五帝)의 서적들. 뜻이 바뀌어, 성현(聖賢)이 지은 책들. 이설(異說)도 있음
於書,無所不窺。
젊어서 유학을 업으로 하여 한두번 과거시험에 급제를 못하니 기쁜 정을 책에는 3분5적을 보지 못함이 없었다.
爲人朴雅則古稱先, 嚴於取予, 一介不苟,中年精醫術,嘗羅遠古倉扁以及近代劉李諸家之言,著《脈辨正義》五卷、《言言理要》與《素問靈難相發明》,邑人朱家栻 栻(점치는 기구, 나무판 식; ⽊-총10획; shì)
爲之傳。
사람이 소박하고 우아하여 고대에 먼저를 칭하며, 나에게 취함은 엄격하니 한 개를 구애받지 않아서 중년에는 의술에 정통하여 일찍이 멀리 태창공, 편작을 망라하여 근대 유이의 여러 의가의 말을 보며 맥변정의 5권, 언언이요와 소문영난상발명을 지으니 읍 사람인 주가식의 전기가 있다.
張文遠
장문원
按《金壇縣志》:張文遠,字振凡,善醫,尤工於胎產。
금단현지를 살펴보면 장문원은 자가 진범으로 의학을 잘하니 태산에 더욱 공들였다.
著《保生集要》一卷,提學副使馮序之以行。
보생집요 1권을 지으니 제학부사 풍씨가 서문으로 간행하였다.
萬曆四十年,授太醫院官。
만력 40년에 태의원관에 제수되었다.
子祥元字元如,亦以工軒岐術,稱授太醫院吏目。
아들인 이상원은 자가 원여로 또한 헌원과 기백의 의술에 공들여서 태의원이목에 제수되었다고 칭한다.
湯文
탕문
按《金壇縣志》:湯文,字涵春,生嘉靖中。
금단현지를 살펴보면 탕문은 자가 함춘이며 가정 연호에 태어났다.
家貧,晝耕夜讀,手不釋卷,行田時倦,則臥畦畔苦吟,或負擔展書,擔頭誦之。
집이 가난하여 낮에 밭갈고 밤에 독서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밭에서 일할때는 권태롭고 밭두렁에 누울때는 쓰게 읊조리니 혹은 등에 지고 멜때 책을 펴고 머리에 이고 암송하였다.
時以儒業見,一不售,即從學醫道,殫究原本,辨陰陽應象, 六節藏象之祕,投劑無不效者。
때에 유학으로 나타나서 한번도 급제하지 않아 의학도리를 따라서 배우며 죽을정도로 본원을 연구하여 음양응상대론과 육절장상대론의 비밀을 변별하고, 약제를 투여함에 효과가 없음이 없었다.
常曰:士遇則爲良相,不遇則爲良醫,皆以燮理陰陽爲道耳。若使診視諸證,莫辨二氣互勝之理,疾何由愈?
탕문이 항상 말하길 선비를 만나면 좋은 재상이 되고자 하고, 만나지 못하면 좋은 의사가 된다고 하니 모두 음양의 빛나는 이치의 도일 뿐이다. 만약 여러 증을 진찰하여 보면 2기가 상호 이기는 이치를 변별하지 않으면 질병이 어찌 낫겠는가?
王肯堂以爲名言,盛行於世,以不受謝,僅有田四十餘畝,分其半與弟,豐膳奉父,不以煩其弟也。
왕긍당이 이름을 말하니 세상에 성행하니 사례를 받지 못하니, 겨우 밭 40여무가 있어서 반을 나눠서 아우에게 주고 풍부한 반찬으로 아버지를 봉양하니 아우를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萬曆初,授太醫院吏目,子宗元別有傳。
만력 초기에 태의원이목을 제수받아서 아들인 종원이 따로 전기가 있었다.
仲子宗禹字養原,亦以醫名,切脈對藥有別見,能起危證而生之,時獲豐資,遇人有所急,悉爲施予散去。
둘째 아들 탕종우는 자가 양원이며 또한 의사로 유명하여 진맥하고 약을 따로 봄이 있으니 위급증상을 일으켜서 살게 하니 풍부한 자금을 얻으면 급함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모두 줘서 흩어지게 했다.
萬曆壬子授太醫院吏目,舉鄉飲賓。
만력 임자년에 태의원이목에 제수되어 향음빈에 천거되었다.
年八十四卒。
나이가 84세에 죽었다.
徐春甫
서춘보
按《祁門縣志》:徐春甫,字汝元,汪宦門人。
기문현지를 살펴보면 서춘보는 자는 여원이며, 왕환문의 사람이다.
醫家書無所不窺,著有《古今醫統》、《醫學捷經》,居京邸,求醫甚衆,即貴顯者不能旦夕 단석: 짧은 시간. 단시간
。
의사의 책을 보지 못함이 없으니 저서는 고금의통, 의학첩경이 있으니 수도의 대궐에 살아서 의학을 구함이 매우 많으니 귀함이 드러난 사람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致授太醫院官。
태의원관에 제수되었다.
施夢暘 暘(해돋이, 해가 뜨다 양; ⽇-총13획; yáng)
시몽양
按《吳縣志》:施夢暘,字應章,其先自浙徙吳。
오현지를 살펴보면 시몽양은 자는 응장이니 선대에 절강에서부터 오에 이사왔다.
嘉靖丁巳補吳庠生 상생: 지방 학교 학생
,屢試不售,遂習岐黃術,洞悉祕奧,得註籍醫院。
가정 정사년에 오나라 학교를 보수하니 자주 시험봐도 급제하지 못하여 기백과 황제의 의술을 익히니 비밀을 다 통찰하여 주적의원을 얻었다.
萬曆七年,奉召入部,承事十五年,吳中歲凶捐藥資,設局海紅坊巷賑濟,自丁亥至壬辰六月間,水旱頻祲 祲(요기, 재앙을 일으키는 기운 침; ⽰-총12획; jìn,jīn)
,全活無筭 筭(산가지 산; ⽵-총13획; suàn)이 원문에는 算으로 되어 있다.
。
만력 7년에 봉소가 부에 들어가서 일을 15년을 이어서 오중에 해가 흉년으로 약의 자금을 버리고 설국 해홍방항에서 진휼하여 구제하니 정해년부터 임진년 6월까지 홍수와 가뭄을 자주 재앙이 있어서 전부 살린 사람을 셀 수 없다.
今海弘禪寺,即濟貧故址 址(터 지; ⼟-총7획; zhǐ)
也。
지금 해굉선사는 곧 빈민을 구제하는 오래된 터이다.
左維垣
좌유원
按《涇縣志》:左維垣,訓科震道之後,家傳醫學,尤精傷寒治法,常以濟世爲念,往往有破棺而出者,酬金不拜也。
경현지를 살펴보면 좌유원은 훈과 진도의 후예로 집안에 의학을 전수받아서 더욱 상한치료법을 정통하니, 항상 세상을 구제함을 생각하여 왕왕 관을 깨고 꺼내 살린 사람이 있으니 금으로 보수하여도 받지 않았다.
萬曆間,授太醫院醫官。
만력에 태의원의관에 제수되었다.
釋普照
석보조
按《鎮江府志》:釋普照,萬曆末至金壇,不知其所自來。
진강부지를 살펴보면 석보조는 만력 말에 금단에 이르니 어디서부터 온지 알지 못했다.
精於醫,多祕方,治瘡瘍湯火諸患,立有神效,不責報於人。
의학에 정통하여 비방이 많으니 창양탕화의 여러 질환을 치료함에 곧 신기한 효과가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年八十餘卒。
나이는 80여세에 죽었다.
王肯堂
왕긍당
按《明外史》:吳傑傳士大夫以醫名者,有王肯堂,字宇泰,金壇人。
명외사를 살펴보니 오걸전 사대부가 의사로 유명하니 왕긍당이 있어서 자는 우태로 금단 사람이다.
萬曆中舉進士,選庶吉士授檢討,以京察貶 貶(떨어뜨릴, 낮추다 폄; ⾙-총12획; biǎn)
官終。
만력에 진사로 천거되어 여러 길한 선비로부터 선택하여 검토를 받아서 서울에서 살피고 관직을 폄하하면서 죽었다.
福建參政肯堂博極群書,兼通醫學。
복건참정 왕긍당은 여러 책을 널리 지극하며 의학에 정통하였다.
所著《證治準繩》爲醫家所宗。
저서는 증치준승으로 의사의 종주가 된다.
按《野史王樵傳》:樵子肯堂,字宇泰,舉萬曆十七年進士,選庶吉士授檢討,博覽群籍,聲著館閣. 倭寇朝鮮疏,陳十議,願假御史衘, 練兵海上,疏留中, 因引疾歸,旋遇京察,以浮躁論, 調家居.
야사왕초전을 살펴보면 초자 왕긍당은 자가 우태로 만력 17년에 진사가 되어 여러 길한 선비에서 선택하여 검토를 받아서 여러 서적을 널리 보니 명성이 관각에 드러났다. 왜구가 침입해 조선에 상소를 올리니 10의를 올려서 원컨대 어사함을 빌어서 병사를 바다위에서 훈련시켜서 머무르는 중에 상소를 올려서 서울로 돌아와서 시끄러운 여론을 뜨게 하니 집을 고르게 하였다.
久之,吏部侍郎楊時喬薦補南京行人司副,終福建參政。
오래하여, 이부시랑 양시교가 남경에 보충 천거하여 행인사부가 되어 복건 참정으로 죽었다.
肯堂平生無他嗜,獨好著書,尤精於醫,所著《證治準繩》,該博精粹,世競傳之。
왕긍당은 평생 다른것을 즐기지 않고 홀로 저서를 즐겨서 더욱 의학에 정통하니 저술인 증치준승은 해박하고 정수가 있어서 세상에서 다투어 전한다.
陶華
도화
按《浙江通志》:陶華,字尚文,餘杭人。
절강통지를 살펴보면 도화는 자가 상문으로 여항 사람이다.
治病有奇效,一人患病,因食羊肉涉水,結於胸中,其門人請曰:
병을 치료함에 기묘한 효과가 있어서 한 사람이 질병을 앓아서 양고기를 먹어서 물을 건너서 가슴속에 결체가 있어서 문인이 청해 말했다.
此病下之不能,吐之不出,當用何法?
이병은 사하하여도 낫지 않고 토해도 배출되지 않으니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까?
陶曰:宜石砒一錢。
도화는 비석 1전을 사용하라고 했다.
門人未之信也,乃以他藥試之,不效。
문인이 믿지 못하여 다른 약으로 시험하니 효과가 없었다.
卒依華言,一服而吐,遂愈。
마침내 도화의 말에 의거하여 한번 복용하여 토하게 하니 나았다.
門人問之曰:砒性殺人,何能治病?
문인이 그에게 묻길 비소의 성질은 사람을 죽이니 어찌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陶曰:羊血大能解砒毒,羊肉得砒而吐,而砒得羊肉則不能殺人,是以知其可愈。
도화가 말하길 양의 피는 크게 비소독을 푸니 양고기는 비석을 얻으면 토하니 비석은 양고기를 얻으면 사람을 죽이지 못하니 그래서 나을 수 있음을 알았다.
後來省郡治傷寒,一服即愈,神效莫測,名動一時,然非重賂 賂(뇌물 줄, 재화 뢰{뇌}; ⾙-총13획; lù)
莫能致論者,以是少之。
뒤에 성군에서 상한을 치료함에 한번 복용하면 나으니 신기한 효과를 측정키 어려우니 이름이 일시에 진동하니 그래서 귀중한 선물을 하지 않으면 논의를 이르게 하지 않아서 그래서 적게 하였다.
所著《六書》,曰瑣言、曰家祕、曰殺車槌法、曰截江網、曰一提金、曰明理續論,仲景以後一人而已。
육서를 지으니 쇄언, 가비, 살거추법, 절강망, 일제금, 명리속론이니 장중경 이후의 뛰어난 한 사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