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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 의부전록 의술명류열전3 506권

고금도서집성의부전록 (古今圖書集成醫部全錄)은 중국 청나라 장정석(蔣廷錫) 등의 편찬으로 1723년에 간행된 의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일부분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부터 청나라 초기의 문헌까지 의학문헌 100여 종을 분류하여 편찬한 것으로, 고전 의서에 대한 주석, 각과 질병의 변증논치(辨證論治) 및 의학과 관련 있는 예문(藝文), 기사(記事)와 의학자의 전기(傳記) 등을 포괄한다. 전 520권이며, 기초이론, 분과 치료, 논술과 처방 등 내용이 풍부하며, 서술이 체계적이고 전면적이다. 영인본이 나와 있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欽定古今圖書集成]으로 황제가 친히 명령하여 고금의 모든 도서를 모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략 康熙 연간에 陳夢雷(1651~1723) 등이 편찬하기 ..
고금도서집성의부전록 (古今圖書集成醫部全錄)은 중국 청나라 장정석(蔣廷錫) 등의 편찬으로 1723년에 간행된 의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일부분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부터 청나라 초기의 문헌까지 의학문헌 100여 종을 분류하여 편찬한 것으로, 고전 의서에 대한 주석, 각과 질병의 변증논치(辨證論治) 및 의학과 관련 있는 예문(藝文), 기사(記事)와 의학자의 전기(傳記) 등을 포괄한다. 전 520권이며, 기초이론, 분과 치료, 논술과 처방 등 내용이 풍부하며, 서술이 체계적이고 전면적이다. 영인본이 나와 있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欽定古今圖書集成]으로 황제가 친히 명령하여 고금의 모든 도서를 모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략 康熙 연간에 陳夢雷(1651~1723) 등이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가 蔣廷錫(1669~1732) 등이 이어받아 근 50년 만인 雍正4년 1726년에야 완성하였다.전서의 총 권수 1만 권, 1억6천만여자로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백과전서이다. 목록만 해도 40권에다가 經史子集의 문헌 3523종이 포괄되어 있다. 역사정치, 문화예술, 과학기술, 제자백가 등 상고시대로부터 淸初까지 동양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였는데, 天文을 기록한 曆象彙篇, 지리·풍속의 方輿彙篇, 제왕·백관의 明倫彙篇, 의학·종교 등의 博物彙篇, 문학 등의 理學彙篇, 과거·음악·군사 등이 들어있는 경제휘편의 6휘편으로 크게 나뉘어 진다.



이를 다시 32典 6,109部로 세분하였고 각 부는 彙考·총론·도표·列傳·藝文·選句·紀事·雜錄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의부전록’은 바로 이『고금도서집성』중의 일부로 정확히는 博物彙篇 藝術典(2917~2928冊)에 들어있다. 초간본은 武英殿聚珍版 구리활자판인데 매우 희귀하며, 이 책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 과정도 상당히 극적이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학술자료를 모으게 하고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능력 있는 북학파 학자들을 檢書에 등용하는 학예진흥책을 벌였다. 당시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던 徐浩修(1736~1799)는『古今圖書集成』전질을 구해오라는 특명을 받고 떠났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대단한 귀중본으로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서 마침내 중개인을 앞세워 翰林院에 뇌물을 주고서야 기어코 銅活字初印本 1질을 구할 수 있었다. 정조는 너무 기뻐서 책의 장정을 새로 잘 고쳐서 창덕궁 규장각의 皆有窩에 소장케 하였다. ‘개유와’란 ‘모든 것이 다 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그 기상을 찬탄할 만하다.



또 규장각은 애초에 訥齋 梁誠之(1414~1482)가 세조 재위초기에 설립을 奏請한 바 있으나 실행되지 못했던 것인데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이룩되었다. 『의방유취』의 교정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보건의료제도의 설비, 軍陣醫 확대를 주창하여 의서 출판과 의료정책 측면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던 양성지의 국가도서관리제도 계획안이 실현되어 마침내 『도서집성』의 수장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기막힌 인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이용되는 流布本은 1884년 上海圖書集成局에서 간행된 것으로 오류가 많고 1890년 上海同文書局이 영인한 것에는 고증이 첨부되어 있어 비교적 정확하다고 한다. 색인으로는 일본 문부성에서 펴낸 [고금도서집성분류목록]이 있고 L. 자일스가 [An Alphabetical Index]를 대영박물관에서 간행한 바 있다. 또『古今圖書集成續錄初稿』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국내에도 이들 다양한 판본과 참고서가 수장되어 있어 참조할 수 있다.실용적인 목적이 뛰어나서였는지 전서와는 별도로 의학부분은 훨씬 더 많이 인쇄되었는데, 초인본을 축쇄영인한 것이 있고 표점과 교정을 가한 연활자본 등 몇 종의 편집본이 나온 바 있으나 교감이 정확치 않고 임의로 산삭한 부분이 있어 고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계의 衆評이다. 또 이들 후대의 편집본을 펴내면서 ‘의부전록’ 혹은 ‘의부전서’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다소 적절치 않은 이름으로 원서명을 고려한다면 ‘고금도서집성醫部’가 정확한 표현이다.

예시문
古今圖書集成醫部全錄卷五百六
고금도서집성 의부전록 506권

 醫術名流列傳
의술명류열전

  北魏
북위

   徐謇 謇(떠듬거릴, 어렵다 건; ⾔-총17획; jiǎn)

서건

按《魏書》本傳:徐謇,字成伯,丹陽人。
위서 본전을 살펴보면 서건은 자가 성백으로 단양땅 사람이다.
家本東莞 莞(왕골, 골풀 완; ⾋-총11획; guān,guǎn,wǎn)
,與兄文伯等皆善醫藥。
집이 본래 동완으로 형 섬누백등이 모두 의약을 잘했다.
謇因至青州,慕容白曜平東陽獲之,表送京師。
서건은 청주에 이르러서 모용백요평동양에서 얻으니 표를 서울에 보냈다.
顯祖欲驗其所能,乃置諸病人於幕中,使謇隔而脈之,深得病形,兼知色候,遂被寵遇,爲中散,稍遷內侍長。
현조가 그 능력을 시험하여 여러 환자를 장막 안에 두고 서건이 간격을 두어 진맥하게 하여 병의 형체를 살피게 하니 색의 징후를 알게 하니 총애하는 사람을 만나면 중간이 흩어지고 조금 안에 시장으로 옮겼다.
文明太后時問治方,而不及李修之見任用也。
문명태후시대에 치료방을 물으니 이수지가 마음대로 사용함에 이르지 못했다.
謇合和藥劑,攻救之驗。
서건이 약제와 합하여 공격하여 구제하여 효험이 있었다.
精妙於修,而性甚秘忌,承奉不得其意者,雖貴爲王公,不爲措療也。
수행에 정밀하고 오묘하고 성품이 매우 비밀스럽고 꺼려서 승봉이 뜻을 얻지 못하니 비록 귀한 왕공이 되나 치료를 조치하지 못했다.
高祖後知其能,及遷洛,稍加眷幸,體小不平,及所寵馮昭儀有疾,皆令處治。
고조는 뒤에 그의 능력을 알고 낙양에 옮겨서 조금 다행하게 하고 몸은 작고 평화롭지 못하여 총애하는 풍소의가 질병이 있어서 모두 처치게 하였다.
又除中散大夫,轉右軍將軍侍御師。
또한 중산대부에 제수되어 우군장군시어사로 바뀌었다.
謇欲爲高祖合金丹,致延年之法,乃入居崧 崧(우뚝 솟을, 산이름 숭; ⼭-총11획; sōng)
高,採營其物,歷歲無所成,遂罷。
서건은 고조가 금단에 합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에 이르러 숭산 높은 곳에 살아서 물건을 영화롭게 함을 채집하여 여러 해에 완성함이 없고 끝났다.
二十二年,高祖幸懸瓠,其疾大漸,乃馳驛召謇,令水路赴行所,一日一夜行數百里。
22년에 고조는 다행히 표주박을 매달아서 질병이 크게 점차되어 역사에 달려 서건을 부르니 물길이 다다라서 하루 낮과 하루 밤에 수백리에 이르렀다.
至診省下治,果有大驗。
진료하고 살펴서 치료가 되니 과연 큰 효험이 있었다.
高祖體少瘳,內外稱慶。
고조의 몸이 조금 나으니 안팎으로 경사라고 칭하였다.
九月,車駕發豫州,次於汝濱,乃大爲謇設大官珍膳,因集百官,特坐謇於上席,遍陳餚觴於前,命左右宣謇救攝危篤振濟之功,宜加酬賚 賚(줄, 하사하다 뢰{뇌}; ⾙-총15획; lài)
。乃下詔曰:
9월에 수레어가가 예부에 발하여 여빈에 다음에 다거 크게 서건에세 대관의 진수성찬을 설피하게 하고 모든 관리를 모아서 특별히 상석에 서건을 앉혀서 앞에 안주와 술잔을 두루 펼쳐서 좌우에게 유건이 위독함을 구제한 공로를 거느리게 하여 보수로 하사하며 조서로 말했다.
夫神出無方,形稟有礙,憂喜乖適,理必傷生。
신기하게도 방법이 없는데서 꺼내 형체가 장애를 받아서 알맞은데서 어긋남에 근심하니 이치가 반드시 생명을 손상하였다.
朕覽萬機,長鍾革運,思芒芒而無怠,身忽忽以興勞。
짐이 만기를 열럼하니 혁명의 운으로 망망함을 생각하여 권태가 없으니 몸이 갑자기 일어났다.
仲秋動痾,心容頓竭,氣體羸瘠,玉几在慮。
둘째 가을에 숙병이 발동하여 마음과 용모가 다하고 기체가 파리하고 수척하여 옥 안석에 염려가 있었다.
侍御師右軍將軍徐成伯,馳輪太室,進療汝蕃,方窮丹英,藥盡芝石,誠術兩輸,忠妙俱至,乃令沉癆勝愈,篤瘵克痊,論勤語效,實宜褒 褒(기릴, 넓다 포; ⾐-총15획; bāo)
錄。
대어사 우군장군 서성백은 태실에 말달려 와서 여번을 치료하니 바로 단영을 궁구하고 약이 지석을 다하니 진실의 기술은 양쪽으로 보내지고 충성은 오묘하게 모두 이르니 침체한 노채가 이기니 독실한 폐병을 완전히 극복하고 근면을 논의하고 효과를 말하니 실로 기록할만하다.
昔晉武暴疾,程知應增封,辛疚 疚(오랜 병, 꺼림하다 구; ⽧-총8획; jiù)
數朝,錢爵大墜。
예전에 진무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정지응이 봉함이 더해져서 힘들게 몇 번 조공하니 지위가 크게 떨어졌다.
況疾深於曩辰,業難於疇 疇(밭두둑, 경계 주; ⽥-총19획; chóu)
日,得不重加陟賞乎?
하물며 질병이 접때 진시에 심하니 경계의 날에 업이 어려우니 상을 옮김에 중요치 않겠는가?
宜順羣望,錫以山河。
여러 바람을 따라서 산하를 크게 했다.
且其舊逕 逕(소로, 좁은길 경; ⾡-총11획; jìng)
高秩,中暫解退,比雖銓 銓(저울질할, 저울, 대패 전; ⾦-총14획; quán)
用,猶未 【 闕 원문은 궐 대신 附로 되어 있다.
二字】 準舊量今,事合顯進,可鴻臚 臚(살갗, 가죽 려{여}; ⾁-총20획; lú,lǔ)
卿金鄉縣開國伯,食邑五百戶,賜錢一萬貫。
옛 길과 높은 녹봉은 중간에 잠시 풀려 물러나니 이는 비록 저울을 사용하나 없어서 기준이 예전인데 지금을 헤아리니 일이 현저한 나아감에 합하니 홍로경금향현에 개국한 백작은 식읍이 500호이며 돈 만관을 하사받았다.
又詔曰:錢府未充,須以雜物絹二千匹,雜物一百匹,四十匹出御府,穀二十斛,奴婢十口,馬十匹,一匹出驊騮 驊(준마 화; ⾺-총22획; huá)
騮(월따말 류{유}; ⾺-총20획; liú)
,牛十頭。
또 조서에서 말하길 돈 창고가 차지 않아서 잡다한 물건 비단 2천필과 잡물 100필과, 400필을 임금창고에서 꺼내서 곡식 200말, 노비 10명, 말 10필, 한 필에 화류말을 내어서 소는 10마리였다.
所賜雜物奴婢牛馬,皆經內呈。
하사한 잡불과 노비와 소와 말은 모두 안을 통해 드러난다.
諸親王咸陽王禧等各有別賚,并至千匹。
여러 친왕 함양왕 희 등은 각각 따로 하사한 물건이 있어서 1000필에 이른다.
從行至鄴 鄴(땅 이름, 춘추시대 제나라의 읍 업; ⾢-총16획; yè)
,高祖猶自發動,謇日夕左右。
따라 다녀서 업에 이르러 고조는 스스로 발동하여 서건은 낮과 밤 좌우에 있었다.
明年,從詣馬圈,高祖疾勢遂甚,戚戚不怡。
다음 해에 교지와 마권을 따라 고조의 질병의 세력이 점차 심해지니 슬프며 기쁘지 않았다.
每加切誚 誚(꾸짖을 초; ⾔-총14획; qiào)
,又欲加之鞭捶,幸而獲免。
매번 간절히 꾸짖고 또한 채찍과 매를 가하려고 하니 다행히 면할 수 있었다.
高祖崩,謇隨梓宮還洛。
고조가 죽자 석건은 재궁을 따라 낙양에 돌아왔다.
謇常有藥餌,及香服道符,年垂八十,鬢髮不白,力未多衰。
서건은 항상 약이가 있어서 향기 복용과 도술의 부적으로 나이가 80세에 살쩍과 모발이 희어지지 않고 많이 쇠약하지 않았다.
正始元年,以老爲光祿大夫,加平北將軍,卒延昌。
정시원년에 늙어서 광록대부가 되어 평북장군에 더해져서 연창에서 죽었다.
初贈安東將軍齊州刺史,諡曰靖。
초기에 안동장군 제주자사에 추증되니 시호는 정이라고 했다.

   王顯
왕현

按《魏書》本傳:王顯,字世榮,陽平樂平人。
위서 본전을 살펴보면 왕현은 자가 세영으로 양평락평 사람이다.
自言本東海郯 郯(나라 이름, 姓 담; ⾢-총11획; tán)
人,王朗之後也。
스스로 본래 동해 사람 왕랑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祖父延和中南奔,居於魯郊,又居彭城。
조부 연화는 남분에 맞아서 노교에서 거처하고 또한 팽성에 살았다.
伯父安上,劉義隆時板行館陶縣。
큰아버지 안상은 유의륭시대에 판으로 관도현에 행차했다.
世祖南討,安上棄縣歸,命與父母俱徙平城,例敘陽都子,除廣寧太守。
조상은 남토는 왕안상은 현을 버리고 돌아와서 부모를 모두 평성에 이사하라고 명하고 서양도자를 배열하고 광녕태수에 제수되었다.
顯父安道,少與李亮同師,俱學醫業,粗究其術而不及亮也。
아버지 안도는 젊어서 이량과 함께 스승을 삼아서 함께 의업을 배워서 거칠게 기술을 연구하나 이량만 못했다.
安上還家樂平,頗參士流。
안상은 집 낙평에 돌아가니 자못 참사의 부류가 되었다.
顯少歷本州從事,雖以醫術自通,而明敏有決斷才用。
왕현이 젊어서 본주를 지나 종사하여 비록 의술이 스스로 통달한다고 하나 명민해 결단하는 재주가 있었다.
初,文昭太后之懷世宗也,夢爲日所逐,化而爲龍而繞 繞(두를, 감다 요; ⽷-총18획; rào)
后。
초기에 문소태후가 세종을 회임할 때 꿈에 해가 쫒아와서 변화하여 용이 되어 왕후를 감쌌다.
后寤而驚悸,遂成心疾。
왕후가 깨어 놀라 두근거려서 마음질환이 되었다.
文明太后敕 敕(조서 칙; ⽁-총11획; chì)
召徐謇及顯等爲后診脈。
문명태후가 서건과 왕현등을 불러오라고 칙령을 내려 왕후를 진맥하게 했다.
謇云:是微風入臟,宜進湯加針。
서건이 말하길 이는 미풍이 장에 들어와서 탕을 진상하고 자침해야 합니다.
顯云:按三部脈非有心疾,將是懷孕生男之象。
왕현이 말하길 3부맥은 마음질병이 아니니 임신하여 남자를 생성하려는 현상입니다.
果如顯言。
과연 왕현의 말과 같았다.
久之,召補侍御師尚書儀曹郎,號稱幹事。
오래되어 보하는 시어사상서의 조랑을 불러 간사라고 호칭하였다.
世宗自幼有微疾,久未差愈,顯攝療有效,因是稍蒙盼 盼(눈 예쁠, 보다 반; ⽬-총9획; pàn)
識。
세종이 어렸을때부터 약간 질병이 있어서 오래되어 낫지 않아서 왕현의 조섭과 치료에 효과가 있어서 그로 인해 조금 분직을 덮었다.
又罷六輔之初,顯爲領軍千烈,間通規策,頗有密功,累遷游擊將軍,拜廷尉少卿,仍在侍御營進御藥,出入禁內。
또한 6보의 초기를 끝내고 왕현은 영군천열이 되어 간혹 규책에 통하고 자못 비밀스런 공로가 있어서 자주 유격장군에 옮겨서 정위소경에 올라서 시어영에 있을 때 임금의 약을 진상하고 궁궐내를 출입하였다.
乞臨本州,世宗曾許之,積年未授,因是聲聞傳於遠近。
임본주에 구걸하여 세종이 일찍이 허락하니 오랜 해에 받지 않고 소문이 멀고 가까운 곳에 전해져 들리게 되었다.
顯每與人言,時旨已決,必爲刺史,遂除平北將軍相州刺史。
왕현은 매번 다른사람과 함께 말할 때 시기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반드시 자사가 되어 평북장군 상주자사가 제수 되었다.
尋詔馳驛還京,復掌藥,又遣還州。
역에 달려서 서울에 돌아와서 다시 약을 관장하고 또한 환주에 파견되었다.
元愉作逆,顯討之不利,入除太府卿御史中尉。
원유가 반역을 일으켜 왕현이 그를 토벌하기가 불리하여 태부경어사중위에 제수되어 들어갔다.
顯前後歷職,所在著稱,糾折庶獄,究其姦回,出內惜慎,憂國如家,及領憲臺,多所彈劾,百寮肅然。
왕현은 앞뒤로 직책을 두루하여 소재가 칭해지며 어지러운 여러 옥을 꺽어서 간사한 돌아옴을 연구하고 안의 아낌과 삼감을 나가고 나라를 집처럼 근신하며, 헌대를 다스려서 탄핵이 많아서 모든 동료가 숙연해졌다.
又以中尉屬官,不悉稱職,諷求更換,詔委改選,務盡才能。
또한 중위가 관직에 속하여 직책을 칭하지 않고 풍자하여 다시 교환되니 맡김을 불러 선택을 고치니 임무가 재능을 다하였다.
而顯所舉或有請屬,未皆得人,於是衆口諠譁 諠(잊을, 속이다, 떠들석하다 훤; ⾔-총16획; xuān)
譁(시끄러울 화; ⾔-총19획; huá,huā)
,聲望致損。
왕현은 거론함이 혹은 속을 청하여 아직 모두 사람을 얻지 못하여 이에 여러 말이 시끄러워서 명성과 바람이 손해가 되었다.
後世宗詔顯撰藥方三十五卷,頒佈 佈(펼 포; ⼈-총7획; bù): 원문은 布이다.
天下,以療諸疾。
뒤에 세종이 왕현을 불러 약방 35권을 편찬케 하여 천하에 반포하게 하여 여러 질병을 구제하게 하였다.
東宮既建,以爲太子詹事,委任甚厚。
동궁이 이미 건장하여 태자담의 일을 하니 위임함이 매우 두터웠다.
世宗每幸東宮,顯常近侍,出入禁中,仍奉醫藥,賞賜累加,爲立館宇,寵振當時。
세종이 매번 동궁을 다행히 여기고 왕현이 항상 가까이서 모셔서 왕궁을 출입하여 의약을 받드니, 상으로 자주 하사하여 관의 집을 세워주니 총애가 당시를 흔들었다.
延昌二年秋,以營療之功,封衞南伯。
연창2년 가을에 운영하고 치료한 공로로 위남백에 봉해졌다.
四年正且世宗夜崩,肅宗踐阼 阼(동편 층계, 천자의 자리, 祭肉 조; ⾩-총8획; zuò)
,顯參奉璽策,隨從臨哭,微爲憂懼。
4년 정에는 또한 세종이 밤에 죽어서 숙종이 친히 황제에 오르니 왕현이 참가해 옥새를 받드니 따름이 곡함에 이르러서 약간 근심과 두려움이 있었다.
顯既蒙任遇,兼爲法官,恃勢使威,爲時所疾。
왕현이 이미 임무를 당하니 법관을 겸하여 세력을 믿고 위협하니 당시에 질병이 되었다.
朝宰託以侍療無效,執之禁中,詔削爵位。
조정의 재상은 의탁하여 모셔 치료하게 하여서 효과가 없어서 그를 대궐에 잡아서 조서로 관직직위를 없애려고 했다.
臨執呼冤,直閤以刀鐶 鐶(고리, 가락지 환; ⾦-총21획; huán)
撞其腋下,傷中吐血,至右衞府一宿死。
잡혀가서 원통함을 부르짖고 직접 칼로 액하를 찌르니 손상하여 토혈하고 우위부에 이르러 하룻밤에 죽었다.
始顯布衣爲諸生,有沙門相顯後當富貴,誡 誡(경계할, 훈계하다 계; ⾔-총14획; jiè)
其勿爲吏官,吏官必敗,由是世宗時或欲令其遂攝吏部,每殷勤避之。
비로소 왕현이 포의로 제생이 되어 사문과 서로 왕현이 뒤에 부귀하게 되나 관리가 되지 말라는 경계를 하여 관리가 반드시 패하니 이에 세송시에 혹은 섭리부로 되너 매번 은근이 피하였다.
及世宗崩,肅宗夜即位,受璽冊,於儀須兼太尉及吏部,倉卒百官不具,以顯兼吏部行事矣。
세종이 죽게 되자 숙종이 야간에 즉위하여 옥새와 책을 받아서 법식으로 태위와 이부를 겸집하나 갑자기 모든 관직이 갖추어지 않아서 왕현이 이부행사를 겸하였다.
강희제 ( 康熙帝 ) 때의 진몽뢰 ( 陳夢雷 ) 가 시작한 것을 옹정제 ( 雍正帝 ) 때의 장정석 ( 蔣廷錫 ) 이 이어받아 1725 년에 완성
진몽뢰 (陳夢雷)는 중국 청나라 때 사람. 자(字)는 칙하(則霞), 또는 성재(省齋)이며 복건성(福建省) 민후(閩侯) 태생. 강희(康熙) 연간에 진사가 되어 편수(編修)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나중에 무고를 당해 하옥(下獄)되고 유배되었다. 10여 년 후에 풀려났는데, 옹정(雍正) 초년(初年)에 다시 귀양을 갔으며, 귀양지에서 죽었다. 『도서집성·의부전록(圖書集成·醫部全錄)』 등의 편수를 주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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