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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빈 경악전서 40권 41권 42권 소아칙

總論 一 1 총론 小兒之病, 古人謂之啞科, 以其言語不能通, 病情不易測。 소아 질병은 고대 사람이 벙어리과라고 하여 말이 통하지 않고 병정을 쉽게 측정할 수 없어서였다. 故曰: 寧治十男子, 莫治一婦人; 寧治十婦人, 莫治一小兒。 그래서 말하길 차라리 10명 남자를 치료할지언정 1명 여자를 치료하지 말고, 10명 부인을 치료할지언정 한명 소아를 치료하지 말라고 했다. 此甚言小兒之難也。 이는 매우 소아치료가 어려움을 말함이다. 然以余較之, 則三者之中, 又爲小兒爲最易。 그러나 내가 비교해보면 남자, 부인, 소아의 3중에서 또 소아가 가장 쉽다. 何以見之? 어찌 이를 볼수 있는가? 蓋小兒之病, 非外感風寒, 則內傷飮食, 以至驚風吐瀉, 及寒熱疳癎之類, 不過數種, 且其臟氣淸靈, 隨撥隨應, 但能確得..
總論 一
1 총론

小兒之病, 古人謂之啞科, 以其言語不能通, 病情不易測。
소아 질병은 고대 사람이 벙어리과라고 하여 말이 통하지 않고 병정을 쉽게 측정할 수 없어서였다.
故曰: 寧治十男子, 莫治一婦人; 寧治十婦人, 莫治一小兒。
그래서 말하길 차라리 10명 남자를 치료할지언정 1명 여자를 치료하지 말고, 10명 부인을 치료할지언정 한명 소아를 치료하지 말라고 했다.
此甚言小兒之難也。
이는 매우 소아치료가 어려움을 말함이다.
然以余較之, 則三者之中, 又爲小兒爲最易。
그러나 내가 비교해보면 남자, 부인, 소아의 3중에서 또 소아가 가장 쉽다.
何以見之?
어찌 이를 볼수 있는가?
蓋小兒之病, 非外感風寒, 則內傷飮食, 以至驚風吐瀉, 及寒熱疳癎之類, 不過數種, 且其臟氣淸靈, 隨撥隨應, 但能確得其本而撮取之, 則一藥可愈, 非若男婦損傷, 積痼癡頑者之比, 余故謂其易也。
撥(다스릴 발; ⼿-총15획; bō)
대개 소아 질병은 풍한사 외감이 아니면 음식 내상으로 경풍과 토, 설사나 한열, 감증, 간질 종류로 몇 종류에 불과하며 5장기가 맑고 신령해 치료하는 대로 응하니 단지 근본을 확실히 하여 잡으면 한 약으로도 치료하니 남자와 부인의 손상이 쌓여 고질이 되어 어리석고 완고함과 비교할수 없으니 내가 그래서 치료가 쉽다고 말했다.
第人謂其難, 謂其難辨也;
여러 사람이 소아과가 어렵다고 함은 변증이 어려움이다.
余謂其易, 謂其易治也, 設或辨之不眞, 則誠然難矣。
내가 소아가 쉽다고 함은 치료가 쉬움을 말함이니 설혹 변증이 참되지 않다면 진실로 어렵다.
然辨之之法, 亦不過辨其表裏, 寒熱, 虛實, 六者洞然, 又何難治之有?
그러나 변증하는 방법은 또 표리, 한열, 허실에 불과하니 6가지를 통찰하면 또 어찌 치료에 어려움이 있겠는가?
장개빈 [張介賓]약 1563년 ~ 1640년
명대(明代)의 이름 난 의사이다. 자(字)는 경악(景岳) 또는 회경(會卿)이다. 산음[山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사람이다. 조상은 본디 사천성(四川省) 면죽현(綿竹縣) 사람이었으나 무공(武功)이 있어 소흥위(紹興衛) 지휘(指揮)로 임명되었다. 그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으며, 열 몇 살 때 이름 난 의사 김영(金英)으로부터 의학을 배웠다. 마흔 안팎의 나이에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나갔는데 일찍이 하북(河北) · 동북(東北) 등지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여러 해가 되도록 공명(功名)을 떨치지 못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의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날이 지나자 의사로 이름을 크게 날렸다.

그는 《소문(素問)》 · 《영추(靈樞)》에 대하여 아주 많이 연구하고 잇따라 30년 동안 공부하여 《유경(類經)》을 엮었는데 류(類)로 문(門)을 나누고 꼼꼼하게 주석(注釋)을 달았으며 조리가 일매지고 찾아서 배우기에 쉽다. 또한 《유경도익(類經圖翼)》 · 《유경부익(類經附翼)》 · 《질의록(質疑錄)》을 엮었다. 늘그막에 지난날의 임상 경험을 결합하여 《경악전서(景岳全書)》를 엮어 만들었다.
그는 의학 이론 방면에서, 처음에는 주진형(朱震亨)의 ‘양(陽)은 늘 남아돌고 음(陰)은 노상 모자란다’는 이론에 대하여 상당히 믿고 따랐으나 중년 이후에는 《내경(內經)》의 ‘음평양비(陰平陽秘), 정신내치(精神乃治)’ 등 이치를 근거로 하여 주진형의 위에서 말한 이론에 대하여 크게 반대하였으며, ‘양(陽)은 남아돌지 않는다’ 및 ‘진음(眞陰)은 모자란다’ · ‘인체는 허(虛)가 많고 실(實)은 적다’는 등의 이론을 제기하고 진음(眞陰)과 원양(元陽)을 보익(補益)하고 한량(寒涼)과 공벌(攻伐)의 방약을 조심스레 쓸 것을 주장하였으며, 임상에서 온보(溫補) 방제를 늘 썼으므로 온보파(溫補派)라고 일컬어졌다. 그의 저술과 학설은 뒷세상의 의학에 대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의학대사전, 2001. 6. 15., 한의학대사전 편찬위원회)
번역 한방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전문의 한의사 홍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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