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청신감
《太清神鑒》六卷, 舊本題“後周王樸撰”, 乃專論相法之書也。
태청신감육권 고본제후주왕박찬 내전론상법지서야
태청신감 6권은 본 제목은 후주나라 왕박이 편찬했다고 하니 상법을 온전히 논의한 책이다.
考樸事周世宗爲樞密使, 世宗用兵, 所向克捷, 樸之籌畫爲多。
고박사주세종위추밀사 세종용병 소향극첩 박지주획위다
籌畫:계책(計策)을 세우는 것. 籌策
周世宗:郭榮, 柴榮:921 ~ 959
왕박은 주나라 세종때 추밀사로 세종이 병사를 씀에 가는 곳마다 승리함에 왕박의 꾀의 계획이 많았다.
예시문心術論 심술론
形不勝貌, 心不昧術, 久昧者, 不明也。
형불승모 심불매술 구매자 불명야
형체는 용모를 이기지 못하고 마음은 기술에 어둡지 않으니 오래 어두우면 밝지 않아서이다.
爲物所役, 故屈於用心, 爲事所奪, 故謬於擇術。
위물소역 고굴어용심 위사소탈 고류어택술
사물에 부려지므로 마음씀에 굽히고 일에 빼앗기므로 선택하는 기술에 오류가 있다.
卒至凶咎、悔吝之及也, 然後怨天尤人, 比比皆是, 每一念想, 未嘗不爲太息。
졸지흉구 회린지급야 연후원천우인 비비개시 매일념상 미상불위태식
凶咎 [xiōngjiù] ① 화 ② 재난 ③ 재앙
比比 [bǐbǐ] ① 반복하여 ② 자주 ③ 곳곳에
怨天尤人 :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나무람. 이 말은 《논어(論語)》 헌문(憲問)에“공자가 말하기를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子曰 不怨天 不尤人]’ 하였다.”
흉한 재난, 후회와 인색에 이른 연후에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니 곳곳에 모두 그러하니 매일 생각하길 아직 일찍이 큰 한숨쉬지 않음이 없다.
王樸(?-959年)은 字가 文伯이며 東平(今中国山東東平西北)사람으로 五代时期의 政治人物이다。왕박은 後漢乾祐三年(950年)中狀元하여 校書郎의 제수를 받았다。왕박은 後漢隱帝孱弱하여 小人을 任用하여 관직을 사양하여 歸鄉하였다。後周의 廣順元年(951年)에 郭威의 養子인 柴榮이 澶州節度使가 되어 왕박을 掌書記로 삼아 後대에 관직에 추대했다。顯德元年(954年)에 柴榮이 즉위하여 周나라 世宗이 되니 왕박은 比部郎中으로 승진되어 樞密使로 大臣과 藩镇에서 모두 그를 시기했다。二年에 조서를 받들어 《爲君難爲臣不易論》、《平邊策》을 편찬하며 “攻取之道, 從易者始”主張하였다. “得吳, 則桂、廣皆為內臣, 岷、蜀可飛書而召之, 如不至, 則四面並進, 席卷而蜀平矣。吳、蜀平, 幽可望風而至。”
그는 先수로 南唐을 공격함을 논의하며, 재차 南漢을 취한 뒤에 蜀을 취하며, 最後로 契丹을 공격하여 北漢을 平定하자고 했다。顯德三年(956年)八月에 詔서를 받들어 曆法을 수정해 《欽天曆》十五卷을 撰成하니 唐나라《崇玄歷》基礎위에서 많이 改進하여, 九服晷影函數(正切函數)構造하였다。오래지 않아, 또 王樸은 知開封事로, 京城을 擴大하며, 街道를 開廣하며, 크고 건장하게 하여 日後에 汴京의 雛形을 이루었다。世宗이 兩번 淮南을 공격하여, 王樸은 東京副留守가 되었다。顯德六年(959年)正月에, 조서를 받들어 正雅樂을 고치며, 八十一調를 얻어, 함께“律准”를 만들어 조서로 司依調制曲하였다.。二月에, 河陰檢查黃河堤壩에 이르러서 汴口에 水閘을 세웠다。三月에 詔서를 받들어 汴口에 斗門을 세우고 朝정에 돌아올時에 前任의 宰相 李穀의 집에 방문해, 두 사람이 정상적으로 담론하다, 돌연 王樸이 혼미해 쓰러져 곧 죽었다.
번역자 튼살 흉터 모공 치료하는 이미지한의원www.imagediet.co.kr 홍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