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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 탈출 이미지한의원 성형외과 수술 흉터치료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머틀 농장에는 유령이 돌아다니고 유령이 피아노를 치고, 초상화 속 인물이 움직인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의 집이다. 런던 타워는 유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솔즈베리 백작 부인이 도망치다 사형집행관에게 붙잡혀 난도질당해 죽었다. 16세기 그린타워에서 사람들을 처형한 처참한 사건들이 죽은 영혼들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고 한다. 주변 물체들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폴터 가이스트 현상은 보통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나타난다. 1962년 인디애나 폴리스의 한 가정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나타나 이상한 소리를 내고, 물건을 던지고, 가족을 물어뜯어 혼을 빼놓았다. 이 괴현상은 2주가 지난 후 일단락되었지만 이후에도 가끔 찾아오곤 했다. -..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머틀 농장에는 유령이 돌아다니고 유령이 피아노를 치고, 초상화 속 인물이 움직인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의 집이다.

런던 타워는 유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솔즈베리 백작 부인이 도망치다 사형집행관에게 붙잡혀 난도질당해 죽었다. 16세기 그린타워에서 사람들을 처형한 처참한 사건들이 죽은 영혼들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고 한다.

주변 물체들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폴터 가이스트 현상은 보통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나타난다.

1962년 인디애나 폴리스의 한 가정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나타나 이상한 소리를 내고, 물건을 던지고, 가족을 물어뜯어 혼을 빼놓았다. 이 괴현상은 2주가 지난 후 일단락되었지만 이후에도 가끔 찾아오곤 했다.

-1001 교양사전, 21세기 북스, 캐리 맥닐 지음, 290-291페이지-

최근에도 한 정신병원이 의혹이 증폭되어 CNN의 흉가건물로 등재되었지만 결국 근거없는 헛소문에 불과한 해프닝이 되었다. 또한 여러 흉가도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노이즈 마케팅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흉가에서 살면 이주해서 살면 그뿐이다.
하지만 진짜 흉한 것은 몸에 있는 흉터이다. 흉터는 완전 제거가 어렵고 가릴수만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수많은 임상결과로 거의 모든 흉터 모양 치료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점뺀 흉터나 수두흉터등 작은 것에서 화상흉터등 손바닥크기 이상의 거의 반신이나 상지 전체를 치료하는 경우도 많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또한 성형수술 흉터나 암수술, 교통사고의 정형외과적 수술흉터도 같이 치료한다.
예시문

가슴확대수술 확률과 흉터치료

유방 확대 수술을 받은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자살할 확률이 3배가 높다. 술이나 마약으로 사망할 확률도 3배나 높다. 왜 그럴까? 유방 확대 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대부분 수술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몸에 대한 이미지와 낮은 자존감을 수술 후에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아, 이런 연구를 한 학자들은 분명 여자들일 것야, 큰 가슴이 부러웠던 거야
-1001 교양사전, 21세기 북스, 캐리 맥닐 지음-

기네스북에 가장 가슴 큰 가슴으로 올린 롤로 페라리란 여성은 타살이란 설도 있지만 약물과잉으로 자살로 마감되었다. 보형물이 터질까봐 비행기도 안탔다고 한다. 페라리는 거대한 사이즈의 유방을 상품화하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의 나이트클럽에서 스트립쇼 걸이 되었다. 그녀는 유럽의 쓰레기라고 불리는 저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페라리는 유방 한쪽당 2.8킬로 그램에 달하며 바로 누을 경우 호흡이 곤란했고 비행중에 기압으로 인해 자신의 유방이 공중에서 폭발할까 봐 두려워 비행기마저 탈 수 없었다. 성형 중독에 걸린 자신의 모습에 페라리는 “이제는 더 이상 내 몸에 칼을 계속 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된 수술에도 나는 내 삶을 바꿀 수 없었다. 죽음도 내게는 대수롭지 않다”고 울먹였다. 2000년 페라리는 나를 놓아줘 녹음을 끝낸후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1999년 6월 4년을 끌던 미국 최대의 실리카겔 유방확대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마침내 종결되었다. 실리콘 겔 제조회사 측은 약 17만명에 달하는 피해 여성들에게 32억 달라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데이비드 새루어 교수는 보통 미국 여성들보다 성형수술을 받은 여성들이 수면제나 진정제를 더 많이 복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의 가슴확대 성형수술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가슴확대 수술로 가슴 아래부분이나 겨드랑이에 흉터가 생길 것을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은 가슴확대수술은 완전한 완전범죄가 아닌 것이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가슴확대수술의 겨드랑이 흉터시술을 많이 하는데 같은 부위인 겨드랑이에 다한증, 액취증 수술흉터도 이미지한의원의 수술후 흉터침인 OT침으로 진피를 재생시켜 치료한다.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함과 흉터치료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은 말도 안 되는 병법이었다. 그런데 이겼다. 부하 장수들이 이기고도 이긴 이유를 몰라 얼떨떨해했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이 배수진을 따라 했다. 그런데도 졌다. 왜 그랬을까? 같되 달라야 한다는 상동구이(尙同求異)의 정신을 몰랐기 때문이다.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결과가 같아도 과정마저 같을 수는 없다. 남이 돈 번 주식은 내가 사는 순간 빠지기 시작한다. 같아지려면 다르게 해라. 달라야 같다.

손빈(孫臏)이 방연(龐涓)의 계략에 말려 발뒤꿈치를 베였다. 병신이 된 그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방연의 위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는 합종의 약속에 따라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손빈은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곧장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방연은 황급히 군대를 돌려 자기 땅으로 들어간 제나라 군사를 뒤쫓았다.
손빈은 첫날 밥 짓는 부뚜막 숫자를 10만개로 했다. 이튿날은 5만개, 다음 날은 2만개로 줄였다. 추격하던 방연이 웃었다. "겁쟁이 녀석들! 사흘 만에 5분의 4가 달아났구나. 기병만으로 쫓아가 쓸어버리겠다." 방심하고 달려든 방연은 손빈의 매복에 걸려, 2만대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이것이 유명한 손빈의 부뚜막 줄이기 작전이다. 위나라는 평소 제나라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 손빈은 위나라 군사의 이런 생각을 역이용했다.
후한 때 우후(虞詡)가 많지 않은 군사로 강족(羌族)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 적군의 수가 엄청나 후퇴하자 추격이 거셌다. 상황이 위험했다. 후퇴하면서 그는 손빈의 작전을 썼다. "우리도 부뚜막 작전으로 간다. 대신 숫자를 늘려라." 매일 후퇴하면서 부뚜막의 숫자를 배로 늘렸다. 뒤쫓아오던 강족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 함정이다." 겁을 먹고 위축된 그들을 우후는 적은 군대로 허를 찔러 무찔렀다.
한 사람은 부뚜막 숫자를 줄였다. 한 사람은 반대로 늘렸다. 왜 그랬을까? 상황이 달랐다. 하나는 추격을 받으며 적진을 향해 들어가는 길이었고, 하나는 쫓기면서 후방을 향해 나오는 길이었다. 반대로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부뚜막 숫자를 조작해서 적의 방심과 의심을 샀다. 부뚜막 숫자를 줄이고 늘리고가 중요치 않다. 상황을 장악하는 힘이 중요하다. 배수진은 잘못 치면 더 빨리 망한다. 상동구이!
일침-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끝, 정민, 김영사, 101-103페이지


필자가 번역한 www.upaper.net/homeosta삼국지연의의 제갈공명도 아궁이 숫자를 늘려서 병사를 늘린 것으로 위장하여 사마의로부터 도망을 간 경우도 있다. 논어에서도 군자는 조화로우나 같지 않다는 화이부동을 말했는데 같음과 다름은 다른 듯하다가 또 같다. 예를 들어 성형수술을 하는 것은 남들과 다른 이목구비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미인형이 같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해져버리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별화된 아름다움을 위한 성형수술이후의 흉터치료는 오히려 남과 같은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즉 성형수술로 흉터가 생기면 다른 사람처럼 피부에 흉터가 없게 되는 것을 바라게 된다. 이런 성형수술 흉터는 이미지한의원에서 진피를 자극하는 수술후 흉터침인 OT침과 한약 재생약물침으로 치료가 된다. 단 성형수술도 장밋빛 환상으로 접근했다가 낭패를 보듯이 흉터침 치료에 너무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며 또 희망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개물림 예방 눈감고 가만히 있기와 흉터치료

2013년 3월 12일 방영된 KBS위기탈출 넘버원 프로그램에서는 <개 물림 사고>의 위험성과 대처 방법에 대한 방송을 진행하였다. 개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는 동작을 크게 하여 개를 자극하지 말고 등을 보여서 절대 도망해서는 안되며 개가 덤비면 눈을 감고 동작을 멈춰서 대응해야 한다. 실제 실험을 해 보니 개의 달리는 속도는 어린아이 달리기보다 훨씬 빨라서 도망은 절대 금지이며 개를 자극했다가 눈을 감고 아무런 행위를 안하니 개가 곧 공격성을 잃고 다른일을 함을 알수 있었다.
개에 물리면 2차감염과 파상풍, 광견병등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개의 상처로 기인하여 흉터가 생기는 것도 문제이다. 자는 개에게 뽀뽀를 하다가 입술과 인중이 뜯겨져 나와 성형수술만 2번한 케이스로 방송에 출연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도 개에 물려 흉터 치료중인 아동이 있으며 반려동물 키우는 인구가 급증하므로 개에 의한 사고도 늘고 있다. 2013년부터는 개목걸이와 개입마개를 씌워야 벌금을 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개나 고양이등의 반려동물에 물려서 흉터가 생겼다면 이미지한의원에서 흉터침과 한약 재생약침 치료가 가능하다. 개에 물린 이후에 또 봉합수술이나 이차적인 성형수술로 생긴 흉터도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갑상선암 증가와 갑상선암 흉터치료

여성 갑상선암 유병률은 2003년 암 유병률 10위였다가 10만 명당 59.5명(2008년 기준)이 걸릴 정도 8년만인 지난해에는 1위로 올라섰다. 2008년에 이미 일본의 14배에 이르렀는데 갑상선암이 가장 흔한 암 1위인 사례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갑상선암 입원환자는 지난해 4만6549명 최근 10년간 9배 수준으로 급증했으며 갑상선암 수술 증가율 역시 유사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로 발생 빈도가 높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윤희숙 연구위원은 1일 “초음파 진단기기가 동네 의원까지 확대되면서 지나친 검사를 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한국 1차 의료 발전방향의 모색'이란 보고서를 통해서다.
내용을 보면 2003년까지 10번째로 흔한 암이었던 갑상선암은 2011년 가장 흔한 암이 되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러한 증가현상에는 의원급에까지 보편화된 초음파기기를 활용한 진단서비스의 증가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안화영, 박영주[2009]), 무증상의 일반 인구에게 갑상선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대한가정의학회[2009]), 어느 정도 크기의 종양을 수술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고 관련한 정보를 확산시키는 노력 등의 시스템적 대응은 거의 전무한 상태라 평가될 수 있을 정도이다.서비스의 증가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안화영, 박영주[2009]), 무증상의 일반 인구에게 갑상선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대한가정의학회[2009]), 어느 정도 크기의 종양을 수술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고 관련한 정보를 확산시키는 노력 등의 시스템적 대응은 거의 전무한 상태라 평가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외국에선 증상이 없을 경우 초음파 검사를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며 1차 의료기관(의원)이 특정 분야에선 과잉 경쟁을 하고, 다른 분야에선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 위원은 “더 큰 문제는 왜 갑상샘암이 급증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정부도 모른다는 점”이라며 “그러다 보니 어떻게 1차 의료기관의 시스템을 개선할지에 대한 답도 안 나온다”고 지적했다.

의사 생각에는 갑상선암의 조기검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필자 생각은 다르다. 갑상선은 요오드로 갑상선 호르몬을 만드는데 의료용 방사선이나 일본 원자로 방사능에 오염된 요오드들이 갑상선으로 몰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초음파 보다는 X ray나 CT 방사선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공항 검색대나 공공기관등에서도 X ray를 통한 검사로 피폭량은 늘고 있으며, 2012년 10월 3일 추적 60분 방영내용처럼 증상이 없는 단순 건강검진을 위해서 CT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는것도 문제이다. 아마도 건강검진과 갑상선암의 빈도는 비례를 할 것이다.
필자는 갑상선암을 치료는 하지 않고 갑상선암 수술흉터치료 환자가 많이 방문한다. 처음에 갑상선 수술흉터는 선에 불과하지만 움직일수록 두께가 늘어나고 지렁이처럼 흉측한 모습을 띠고 있다. 특히 쇄골쪽으로 목 아래쪽의 흉터가 오히려 안보이는 것이 아니라 흉터가 더 커짐을 볼 수 있다.
갑상선암 흉터치료방법은 수술후 흉터침인 OT침을 이용하여 진피를 자극 재생하고, 재생하는 한약물을 통해 치료를 한다. 갑상선암 뿐만 아니라 유방암, 위암, 폐암, 대장암등 여러 가지 암수술흉터나 교통사고의 정형외과적 수술흉터, 충수염, 제왕절개등의 외과적 수술도 치료가 가능하다.
거전보과와 외과흉터치료

거전보과(鋸箭補鍋)-책임질 일은 말고 문제는 더 키워라.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았다. 화살이 꽂힌 채 외과의사에게 갔다. 의사는 톱을 가져와 드러난 화살대를 자른다. "자, 됐소!" "살촉은요?" "음. 거기서부터는 내과 소관이오." 이른바 '거전(鋸箭)', 즉 화살 톱질하기다. 절대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가마솥에 작은 구멍이 났다. 땜장이는 녹을 벗긴다며 망치로 살살 두드려 작은 구멍을 더 크게 만든다. "이것 봐요! 하마터면 새 솥을 사야 할 뻔했어요." 구멍을 잔뜩 키워 놓고서야 땜질을 해준다. 주인은 연방 고맙다며 비싼 값을 치른다. '보과(補鍋)', 즉 솥 땜질의 요령이다. 문제를 키워라. 그러고 나서 해결해주어야 고맙단 말을 듣고 돈도 많이 받는다.
리쭝우가 '후흑학(厚黑學)'에서 제시한 '판사이묘(辦事二妙)', 즉 일을 처리하는 두 가지 묘법이다. 시늉만 하고 책임질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문제는 키워서 해결해준다. 이렇게만 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도 유능하단 말을 듣고, 시늉만 해도 역량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갈비뼈 아래가 여러 날 찌르듯 아파 병원에 갔다. 일반 외과로 가라기에 가서 초음파를 찍었다. 담낭에 담석이 있고, 부숴 봐야 100% 재발하니 담낭을 떼라고 판정한다. 제 몸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한다 싶어, 내과 진료를 신청했다. 담낭을 떼라더란 말을 했더니 펄쩍 뛴다. 담석도 없고 깨끗하다. 주변에 희끗한 것은 담석이 아니라 지방간인데 심한 것도 아니다. 담낭을 왜 떼나. 그걸 떼면 제거 후 증후군도 있고 소화에 큰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지금 통증의 원인이 담낭 때문인지도 분명치 않다. 조금 더 지켜보자.
며칠 뒤 등에 부스럼이 돋았다. 결국 피부과에서 대상포진의 진단을 받았다. 외과는 왜 갔어요? 언제부터 그랬어요? 왜 이제 왔어요? 죄인 심문하듯 하는 의사의 짜증 섞인 말투에 속이 상한다. 가라니까 갔고, 비싼 돈 들여 검사해서 멀쩡한 담낭을 뗄 뻔한 것도 고약한데, 누군 늦게 오고 싶어서 왔느냔 말이다.
과로가 신경계의 난조를 빚어 통증과 발진을 불렀다. 외과의사는 담낭 쪽이 아프니 일단 제거하자고 했다. 담낭이 없어도 괜찮은가?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거전의 수법이다. 소화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내과 의사가 고치면 된다. 보과의 방법이다. 병원은 이래저래 이익을 남겨 좋고, 환자는 병이 나아서(?) 고맙다. 그러나 그런가?

일침-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끝, 정민, 김영사, 181-182페이지
농담과는 달리 화살이 박힌 부위까지 치료하는 것이 외과술의 영역이며 한의학에서는 금창상이라고 하여 무기에 손상된 치료를 하는 것이 발달되었다. 이 글을 쓴 한양대 정민 교수님은 병원의 무책임함에 대해서 치를 떨었을 것이다. 잘못해서 정말 담낭을 떼낸 쓸개빠진 사람이 되어버릴 뻔 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사 실수나 의료사고등으로 문제가 생긴 경우가 많다. 필자 한의원에 오신 포목점을 하신 아주머니의 경우 대학병원에서 갑상선 암 진단을 받고 절제수술을 받았는데 암이 아닌 오진으로 목에 절개 흉터가 생겨 병원에 내원한 경우가 있었다. 다른 미혼 여성의 경우 깁스[캐스트]이후에 화상 비슷하게 물집이 발생하고 결국에는 흉터가 발생해 내원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복막염을 막기 위한 맹장수술이나 암수술등 피치 못할 수술도 있고 성형수술처럼 미용적인 시술도 있다. 이런 다양한 흉터를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흉터침과 한약 재생약침과 침을 가지고 치료한다. 세가지가 시너지효과를 가지고 한의학적으로는 기혈순환을 촉진하며 서양해부학적으로는 진피를 복구하는 역할을 한다.

건망증과 치매 구분과 지퍼 모양의 흉터치료

남자가 소변을 볼 때 밑을 보면서
‘이거 언제 써먹었더라?’ 하면 건망증.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이더라?’ 이러면 치매.

건망증 : 우리 집 주소를 잊어먹는다.
치 매 : 우리 집이 어딘지 잊어먹는다.

건망증 : 아내 생일을 잊어먹는다.
치 매 : 아내 얼굴을 잊어먹는다.

건망증 : 심해질수록 걱정된다.
치 매 : 심해질수록 아무 걱정 없다.

건망증 : 볼일 보고 지퍼를 안 올린다.
치 매 : 지퍼를 안 내리고 볼일 본다.

단순히 열쇠가 어디 있는지 일어버리면 건망증이며 열쇠 자체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면 치매이다. 사람의 건망증은 필요악이다. 예를 들어 타인과 안좋은 감정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정상이다. 만약 시시콜콜히 상대방의 단점과 잘못한 점을 기억하고 있다면 정신건강상 해롭다. 실연이나 낙방등을 봐도 세월이 약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타인과 싸웠을 때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하지만 상대방이 내 얼굴에 상처를 내서 흉터를 만들어 오래가면 그 것은 망각할 수 없다. 특히 베이거나 잘린 흉터를 꿰매면 봉합 흉터가 남기 쉬운데 지퍼 모양이 생기게 된다. 즉 원래 생긴 흉터의 모양에 벌레 발과 같은 꿰맨 흉터가 남게 된다. 이런 봉합수술 흉터를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흉터침과 한약 재생약침으로 치료한다.

견훤의 탄생설화와 지렁이 흉터치료

견훤은 867년, 상주의 농부였던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출생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인 상주의 가은현이었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본래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광계 연간에 가문을 일으켜 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본래 성씨는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이(李)씨였으나 훗날 견(甄)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제가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에게는 백융부인 사도라는 왕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후손인 작진이 왕교파리라는 여인과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아자개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견훤은 곧 신라 왕실 외척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리 신빈성있는 기록은 아니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견훤에게는 여러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남동생들로는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등이 있으며 여동생은 대주도금이 있다. 견훤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설화를 하나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아자개에게 식사를 날라 주기 위해 포대기에 쌓인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는데 지나가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견훤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푸른 옷을 입은 남자와 밤에 합방을 해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남자의 옷에 실을 매달아 따라가보니 땅속으로 이어져 있어서 파봤더니 지렁이가 바늘에 꿰인 채로 죽어 있었다더라란 이야기가 있어 토룡(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실제 전승은 지렁이가 아닌 용이었지만 패배자를 폄하하기 위해서 지렁이로 격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출신에 대한 이설로는 신라 토박이가 아니라 백제 멸망 이후에 문경으로 이주한 백제인이란 설도 있다. 위의 지렁이 설화는 광주 북촌이 배경인데, 오기라는 설도 있지만 이를 근거로 모종의 일로 광주에서 도망쳐 나온 집안의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광주(무진주)가 견훤의 근거지 안에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왜곡될 수도 있는 일이다.
견훤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남달리 커졌으며 용모도 비범했다고 전해진다. 장성한 견훤은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로 올라가 무장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데 상주에서 부와 권력으로 제법 큰 세력을 자랑하던 아버지 아자개가 가문의 격을 높이고자 아들을 경주로 보냈다는 말도 있다. 혹은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등쌀에 떠밀려 고향을 떠나야 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그의 동생들 중에 능애를 제외하면 용개, 보개, 소개 등이 모두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능애 정도만이 친동생이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이복 동생이라 이래저래 눈치밥을 먹고 살아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군인이 된 이유는 여전히 확실치 않으나 견훤은 남다른 용맹함과 비범함으로 빠르게 출세하였다. 서남 해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 견훤은 창을 배게삼아 적을 대비하였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기상이 남달랐다. 덕분에 당시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인해 막장 분위기가 짙었던 신라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와 상경하여 군인이 된 견훤은 곧 착실히 경력을 쌓아 비장 벼슬을 받았다. 이후 견훤은 왕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서남해 일대의 호족과 해적의 무리(해상무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호족, 군진 세력)들을 공격하러 나섰다. 한창 명성을 떨치던 견훤이 군사를 일으키자 그가 이르는 곳 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열흘에서 보름 사이에 그를 따르는 무리는 무려 5천 여명이나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강력한 군사력을 손에 넣은 견훤은 마침내 숨겨왔던 야망을 드러내게 시작했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은 마침내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무진주(오늘날의 광주)를 공략해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아직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 (…)라고 자칭했다. 고종 황제의 시호와 신돈의 관직명, 최충헌의 관직명과 함께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긴 이름으로 이는 당나라 시대의 도독, 절도사 개념에서 만든 이름이다.
이처럼 큰 세력을 떨치던 견훤은 당시 북원에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려줌으로써 스스로 한반도 실질적 지배자임을 자처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양길이 훗날 견훤의 라이벌이 될 궁예의 주군이었다는 점이다.
900년, 서쪽을 순행하던 견훤이 완산주에 이르자 완산주의 백성들이 몰려나와 견훤을 크게 환영하였다. 마침내 자신이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음을 알게 된 견훤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이 말은 곧 견훤이 멸망한 백제의 뒤를 이어 신라를 무찌르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포부를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당시 완산주 일대는 과거 백제의 영토로써, 이 곳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백제 유민들의 후손인 현지 백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백제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견훤은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마침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이후 견훤은 관부와 정치체제를 갗추고 군사력을 정비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견훤은 한편 외교에도 힘을 써서 나라를 세운 바로 그 해에 중국의 오월과 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후로도 견훤은 후삼국중에서도 국제외교에 가장 신경을 기울였다.

다른 설화에는 〈고기 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또는 견훤은 지렁이 소생 옛날 아주 먼 옛날 남편을 여의고 혼자인 과부가 길쌈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밤이 되면 용모가 아주 뛰어난 선비가 찾아와 자고 아침이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어서 따라가 보니 지렁이였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한자로는 토룡土龍 토는 지룡地龍이라고 쓰는데 용 용 글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미천한 왕족임을 알수 있다. 필자 생각에는 궁예나 견훤 모두 신라 왕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견훤 출생지가 경북 문경[광주 설도 있음]인데 전북에서 왕이 된 것을 보면 예전과 달리 지역감정이 없었음을 알수 있다. 백제 30대 무왕(武王)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못에 있는 왕이 나타나서 왕과 잠자리를 하게 됐다. 그 후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후에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지렁이는 낚시 미끼로 알지만 한약재로도 쓰이고 여성의 립스틱 원료로도 쓰인다. 다윈도 연구했을정도로 땅에 유익하지만 징그러운 것은 사실이다. 이런 지렁이 모습이 몸에 생겨나는 경우도 있다. 바로 흉터가 있는 경우이다. 겨드랑이 액취증이나 다한증 수술, 가슴확대에 절개 흉터가 지렁이 모양이다. 다른 메스로 자른 흉터도 지렁이 모양 흉터가 많은데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진피 콜라겐을 자극해서 재생시키는 흉터침의 방법으로 치료한다.

경상도 커플의 청혼과 가슴확대수술흉터

꽤 긴 시간 예쁘게 사귀어 온 경상도 커플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정색을 하며, “지는 결혼 모태예~”라고 말했다.
“와예? 와 결혼 모타는데예? 지가 실슴니꺼?”라고 남자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은제예~, 내는 그짝 조씀더~.”
“그람, 와 결혼 모탄다캅니꺼? 와 모타는데예?”
“실은예, 지 가슴이 넘 작아서예~.”
“을매만 한데예? 참외만 합니꺼?”
“으데예~, 택도 업씀더~.”
“마~ 그람 사과만 합니꺼?”
“아니라예. 거보다 작씀더~.”
“그라모~ 계란만 한가예?”
남자의 이 말에 여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마 계란만은 헐 낍니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라마 됐슴더~. 우리 결혼하입시더~.”
두 사람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첫날 밤, 침대에 누워 새신랑은 신부의 가슴을 더듬다가 소스라쳐 놀랐다. 여자의 가슴이 완전 절벽 아닌가.
신랑은 큰소리로 “니 계란 어디 갔노?” 물었다.
신랑의 물음에 신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와예~? 프라이는 계란 아인교~???”

보통 이런 가슴에 대한 고민들을 하는 미혼여성들이 많다. 의학적으로는 아무리 작아도 수유가 가능하기 때문에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결혼해도 된다. 하지만 미용적으로 작은 가슴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슴확대 수술을 한번 고려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확대수술은 나중에 다시 시술을 해야 하기도 하며 겨드랑이에 흉터가 남기도 한다. 필자 한의원에 오신 기혼여성은 이물감 때문에 바로 보형물을 제거했는데 가슴아래에 흉터가 남아 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수술후 흉터침인 O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재생하는 방법으로 흉터를 점차 정상 피부에 가깝게 복구 한다.
홍성민은 한의사, 작가, 한방 피부과 전문의이며 현재 서울 마포구 신촌에서 이미지한의원 www.imagediet.co.kr 02-336-7100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이어트, 튼살, 흉터 위주의 진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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